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마을 뒤편 야산 언덕에 원균 장군의 묘가 있다. 평택의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는 양지바른 자리다. 홍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봉분 앞에 장명등과 망주석, 문인석이 단정하게 서 있다.
묘역은 고요하다. 그러나 이곳에 잠든 것이 원균의 육신은 아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패한 뒤 원균은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묘는 후손들이 장군의 유품 등을 바탕으로 고향인 평택에 마련한 묘역이다. 묘 아래에는 저수지가 있고, 언덕에 올라서면 평택의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봉분 앞에 서자 400여 년 전의 바다가 떠올랐다.
임진왜란, 바다에서 시작된 반전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뒤 대륙 진출을 꿈꾸며 조선을 침략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차례로 무너졌고, 일본군은 빠르게 북상했다. 충주에서 신립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조선의 육상 방어체계는 급속히 붕괴했다.
한양이 함락되기까지는 불과 수십 일이 걸렸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일본군이 육지에서 아무리 진격해도 부산을 거점으로 한 해상 보급로가 끊기면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조선 수군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다.
당시 경상우수사는 원균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원균의 수영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원균은 남은 전력을 수습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후 두 수군이 연합해 옥포·합포·적진포 등에서 일본 수군과 싸웠다.
옥포해전은 조선이 임진왜란 발발 이후 거둔 첫 승리 가운데 하나였다. 육지에서 연이어 패전하던 조선에 바다에서의 승전은 단순한 전과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일본군도 바다를 장악하지 못하면 전쟁을 원하는 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원균도 임진왜란 초기 여러 해전에 참여했다. 훗날 그는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됐다. 적어도 조정이 전쟁 중 그의 공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원균의 전공만으로 그의 생애를 설명할 수도 없다. 그는 이순신과 전공과 지휘권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고, 이러한 갈등은 훗날 원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형성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다시 전장에 선 원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일본은 다시 대규모 병력을 조선에 투입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재침을 막기 위해 수군의 역할을 중시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순신을 둘러싼 지휘체계는 크게 흔들렸다.
일본 측은 조선 수군을 부산 앞바다로 유인하기 위한 계책을 썼다. 조정은 이 정보를 믿었고, 이순신에게 출전을 명령했다. 이순신이 이에 응하지 않자 그는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고, 결국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원균이 이어받았다. 문제는 조선 수군이 상대해야 할 일본 수군이 이미 조선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원균은 부산 앞바다로 출전했지만, 결정적인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장거리 출동과 계속된 전투로 수군은 지쳤고, 가덕도 등지에서 피해도 입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칠천량으로 물러났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은 제대로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았다. 1597년 7월 15일 일본 수군은 수륙 양면에서 조선 함대를 기습했다. 조선 수군의 지휘체계는 무너졌고 많은 전선이 불타거나 파괴됐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원균 역시 육지로 빠져나왔으나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전선 12척을 이끌고 후퇴한 것이 조선 수군의 사실상 마지막 전력이 됐다. 칠천량해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겪은 결정적인 패배였다.
원균은 무능한 장군이었나
그렇다면 원균은 무능한 장군이었을까. 이 질문에 단순히 ‘그렇다’거나 ‘아니다’라고 답하기는 어렵다. 원균에게는 분명한 책임이 있다. 그는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지휘한 최고 지휘관이었다. 출전 과정에서 판단의 문제가 있었고, 적의 움직임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을 잃게 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칠천량의 참패를 원균 한 사람의 능력 부족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유인책에 흔들렸고, 이순신을 교체한 뒤 원균에게 부산 공격을 요구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으로 끌어낸 뒤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제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조선 함대의 약점을 노려 수륙 양면 기습을 감행했다.
더욱이 원균 자신도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출전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1597년 7월 실록에는 원균이 수군 운용 문제와 출전의 어려움을 보고한 내용이 남아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칠천량에서 져야 할 지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칠천량의 책임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조정의 잘못된 판단이 있었고, 지휘관들의 판단과 갈등이 있었으며, 일본군의 치밀한 유인과 기습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최종적으로 함대를 지휘한 원균의 책임도 있었다. 역사는 이 여러 층위의 책임을 함께 살펴야 한다.
패배 뒤에 다시 일어선 사람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은 사실상 무너졌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조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은 배설이 이끌고 후퇴한 12척을 바탕으로 수군을 재건했다. 이후 한 척이 추가되어 13척이 되었고, 이순신은 1597년 9월 16일 명량에서 일본 수군과 맞섰다.
명량해전은 칠천량의 패배가 곧 조선 수군의 종말을 뜻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칠천량에서 무너진 것은 함대였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남은 배가 있었고, 남은 장수가 있었으며, 다시 싸울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에는 이런 역설이 있다. 패배가 반드시 끝은 아니다. 때로는 패배의 원인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에서 다시 시작할 힘이 생긴다.
승자만의 역사는 아니다
원균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금도 극명하게 갈린다.
한쪽에서는 그를 이순신과 대비되는 무능한 장수로 기억한다. 다른 쪽에서는 이순신을 지나치게 영웅화하는 과정에서 원균의 공적과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상황이 과도하게 축소됐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을 살리는 방법이 그의 잘못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됐다. 동시에 그는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이끌었던 최고 지휘관으로서 참패의 책임을 져야 했다. 두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공이 있으면 공을 기록하고, 과오가 있으면 과오도 기록하면 된다.
이순신을 위대한 장군으로 기리기 위해 원균을 필요 이상으로 악인이나 무능한 장수로 만들 필요는 없다. 반대로 원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칠천량의 참패와 그의 지휘 책임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역사는 사람을 영웅과 패장이라는 두 개의 이름표로만 분류하지 않는다.
빈 무덤이 남긴 질문
언덕 아래로 평택의 들판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이곳의 원균 묘는 1980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묘역 아래에는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고향 땅에 마련된 묘역은 한 사람의 생애가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원균의 육신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이름은 남았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임진왜란 초기의 전공과 이순신과의 갈등, 정유재란의 지휘관이라는 이력, 칠천량의 참패와 전사, 전후 선무공신 1등이라는 상반된 기억이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원균의 묘 앞에서는 한 사람의 명예보다 역사의 복잡함을 생각하게 된다.
승자는 찬양 속에 남고 패자는 한 번의 패배로 생애 전체가 규정되기 쉽다. 하지만 한 사람의 생애를 단 하나의 전투로 재단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쉽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고 패배의 책임을 지워서도 안 된다. 원균은 칠천량의 패장이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나라가 위태롭던 시기에 전장에 나섰던 조선의 무장이기도 했다. 그의 공과 과오는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
바람이 묘역의 소나무 사이를 조용히 지난다. 빈 무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한 사람을 승자와 패자 중 하나로만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선택, 공과 과오를 함께 바라볼 것인가.
역사는 승리한 사람만의 기록이 아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딛고 명량의 싸움이 이어졌다. 절망이 나라의 마지막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균의 묘를 내려오며 다시 한번 생각한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무조건 용서하거나 단죄하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공과 과오를 모두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실패에서 오늘의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인지 묻는 일이다.
윤여설 수석논설위원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대한미래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윤여설 칼럼 많이 본 기사
|